지워지지 않는 마법처럼 신비한..

시작이 반이다.. 라는 옛말이 있는데.

그냥 그런 말이 있나보다 라는 식으로 여겨왔다.


아래의 얘기는 자식공부를 위해 자기도 공부를 했던 한 주부의 얘기가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이제 새로운것을 한다는것이 너무 늦었고 성공할 가능성도 적기때문에


아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냥 현실에 안주하길 바라며 사는게 일반적인것 같다.


이분도 처음 부터 박사학위를 목표로 시작 했더라면 그 긴 시간(20년 정도 일걸로 예상)이

힘이 들었을것이다.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가는것도 좋지만 그것 자체를 즐기는듯한 자세로 임한다면 더욱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한다.

요즘들어 할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게 하는 좋은 얘기들이 가끔 들려 오는것 같아 좋다.


이하 원본 ------------------------------------------


“아이위해 공부하다보니 박사돼”…인하대 박사학위 받은 55세 주부 이태옥씨
[파이낸셜] 2006-02-21 02:13


자녀에게 공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옆에서 공부를 시작한 주부가 대학에 들어가 박사학위까지 땄다.

지난 14일 인하대에서 ‘저고리 변천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태옥씨(55·여·서울 개화동·사진)는 20여년 전까진 공부와 거리가 먼 가정주부였다.

이씨의 공부가 시작된 것은 교사(수도전기공고)인 남편 윤동진씨(62)와 함께 일곱살, 다섯살이던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 외곽으로 이사한 지난 81년. 아이들이 탁 트인 공간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공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했지만 막상 가보니 학원 하나 없는 시골에 가까웠다.

학교 공부 보충을 위해서는 가정교육이 필요했다.

마침 이씨의 남동생이 고교입시 공부를 위해 함께 살게 돼 안방을 ‘가족 도서관’으로 개조했다.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오면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처음엔 아이 옆에서 가계부를 쓰던 이씨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책상을 갖다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게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재미도 있고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가 직접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마음을 먹자 숨겨있던 이씨의 향학열이 불타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엔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재능을 살려 대학원(건국대 의류학과)에 들어가 한국 전통 복식(服飾)을 공부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 한복집을 열었다.

침선(針線) 장인을 찾아다니며 사사(師事)해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등에서 13차례 수상했고 한복침선 관련 특허도 6개나 냈다.

배움을 향한 이씨의 열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손재주 못지 않게 깊이 있는 지식에 목 말랐기 때문이다.

인하대 박사 과정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결국 ‘조선왕조 말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저고리에 대한 실증적 변천’이란 논문으로 꿈에 그리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식 농사’에도 성공했다.

큰 아들(32)은 명문대 졸업 후 미국에서 컴퓨터 회사에 취직했고 둘째 아들(30)은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이씨는 “아이들 옆에서 심심풀이로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며 “공부하는 분위기가 잡히니까 아이들도 과외나 학원은 물론 잔소리도 필요없었다. 솔선수범만큼 효과적인 교육법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척 보아하니 인상들도 하나 같이 좋아 보입니다 ^^;


국가간 행복지수라는것을 본적이 있는것 같다. 이 조사의 결론은 나라나 국민의 부유함이 행복을 결정짓지는 않는다는것이다.

상대적인 행복감이라고 하나 주변의 사람들에 비해서 행복한 느낌을 같는게 더 크다는 거다.


그렇단 말은 결국 자신의 행복은 자기가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는건데..

나이가 들고 가정을 가지다 보니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바보같은 소리일지는 모르겠으나 총각때는 사실 크게 돈욕심 없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내 가정을 직접꾸리기전이서 그런가 보다.


이런 분들의 얘기는 나처럼 허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약이다.

중요한것은 똑같은 돈을 벌고 살아도 어떻게 버느냐 또는 어떤일을 하면서 버느냐가 중요한것 같다.


내가 부자로 살수 있음에도 다른 목적 특히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지 않은 삶을 선택한다던가

내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수 있기에 더 이상의 수입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던가..


한가지 궁금한것은 이분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이런 생활에 동의 하고 같이 행복해 하는것인가 이다.


서로를 이해 하고 받아주는 사람과 산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가족을 이해 시키고, 싸워가며 보내야 하는가.


가장 맘에드는 구절은

"사회가 저희에게 변호사로 일할 기회를 줬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저희가 가진 걸 돌려줘야죠."

나도 이렇게 돌려줄수 있는 사람이 됬으면 한다.


부디 이런 좋은일을 하는 분들의 미래는 좋은일만 있기를...


이하 원본 ----------------------------------------


[동아일보] 2006-02-20 03:21
[동아일보] 공익변호사그룹 ‘공감(共感)’의 변호사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도와 온 자신들의 활동이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한번쯤 자랑할 만한데도 모두 말을 아꼈다.

공익소송을 지원하는 변호사 단체로는 국내 첫 번째인 공감이 지난달로 출범 2주년을 맞았다. 주인공은 염형국(廉亨國·33·사법시험 43회) 소라미(蘇羅美·여·32·〃) 정정훈(鄭晸勳·36·〃) 김영수(金永受·37·〃) 황필규(黃弼奎·34·〃 44회) 변호사 등 5명.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2004년 1월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성매매 피해 여성, 장애인 등에게 무료로 법률상담과 소송지원을 해 오고 있다.

▽“가난하지만 부자인 변호사”=A 변호사는 국가에 환수된 한 문중의 땅을 찾아주는 소송을 대리해 70억 원을 성공보수로 받은 사실이 밝혀져 최근 화제와 논란이 됐다.

하지만 공감 변호사들은 공짜로 소송을 대리하기 때문에 수임료와 성공보수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소외된 사람들이 권리를 찾는 것이 성공보수”라고 말한다.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열정과 노력은 큰 데 비해 공감 변호사들이 받는 대가는 적다. 월급으로 받는 170만 원이 전부다.

그래서 공감 변호사들은 웬만한 직장인보다 가난하다. 자녀가 셋인 염 변호사는 전세를 구할 형편이 못 돼 부모 집에 얹혀산다. 소, 김, 황 변호사는 전셋집에 살고 있고, 대출을 얻어 집을 샀던 정 변호사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황 변호사는 “로펌보다 야근을 덜할 줄 알았더니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다”며 “아내에게 생활비 100만 원을 주고 남은 70만 원 가운데 절반은 택시비로 쓴다”고 말했다.

▽공익소송 불모지에서 소중한 결실=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 산하기관으로 출범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무실에 둥지를 튼 공감은 2년간 소중한 열매를 많이 맺었다.

공감이 최근까지 사회적 약자들을 대리한 소송은 총 84건. 법률자문 등 지원 활동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지난해 12월에는 성매매 업주와 사채업자에게서 5500만 원의 빚을 갚으라는 요구에 시달리던 성매매 피해 여성 6명을 대리한 소 변호사가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또 지하철 승강장에서 떨어진 시각장애인의 사건을 의뢰 받아 철도공사에서 5700만 원의 배상금을 받도록 했다.

▽“인권 브로커가 공감의 목적 전파”=공감에는 이들 변호사 5명과 간사인 전영주(全英珠) 씨가 있지만 ‘인권 브로커’라 불리는 예비 법조인들도 있다. 이들은 공익소송을 널리 알리기 위해 법대생과 사법연수원생들로 구성된 ‘무급 인턴사원’이다.

공감은 22일 창립 2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사회가 저희에게 변호사로 일할 기회를 줬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저희가 가진 걸 돌려줘야죠. 약자의 시각에서 공감하고 실천할 때 사회가 더 정의롭고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공감 변호사들은 오늘도 사회의 그늘을 비추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02-3675-7740, 후원계좌: 하나은행 162-910001-07637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

신선한(?)글이 많은 흥국생명의 HK공감+ 에 내 관심을 끄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제목 : 민족의 영산 ‘태백산’은 ‘썰매장’이다?


얘기인 즉, 겨울에 태백산은 눈이 많이 와서 하산하는길에 눈썰매를 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더우기 완만한 코스도 많아서 많은 사람이 대놓고(?) 탄단다. 그래서 사고도 많이 나고.


본인의 경우 지리산에 겨울산행을 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첫 경험(?)을 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그럴 요량으로 간건 아니었지만 한산하는데 썰매를 타고 내려가는 동네 주민분의 멋진 포즈를 보고 무작정 배낭에서 두타 비닐봉지(개중 튼튼한 놈이었음)를 꺼내어 지리산을 단숨에 미끄러져 내려왔었다.


그 느낌은 뭐 랄까..? 흠흠 스키보다는 100배 재미있는 눈썰매 보다는 50배 재미있는 그런것이 었다.


내려와 보니 빤스가 찢어져 있었다. 하도 쿵쾅거려서..


태백산.. 그렇단 말인가..?


그곳이 산악썰매의 메카였구나..


내 언제 한번 타주리라.


튼튼한 비료포대와 완충제는 필수 조건이닷..!!

원문 http://www.hungkuk.co.kr/hkplus/hk_mrh.jsp?nextURL=Y3BhZ2U9MSZub3RlaWQ9MTUwNj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