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마법처럼 신비한..

중증 장애인 아들을 데리고 철인 3종경기를 하는 아버지의 얘기다.


언젠가 들은적이 있는것 같은데.. 후~


사실 허약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이런 얘기를 접할때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이란 생각이다.


마음이 참 답답~ 해 지지만 이렇게 해쳐나가는 사람들의 얘기를 보면 그저 훌륭합니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참 인상 깊었다.


아들인 릭이 아버지가 제작해준(?) 특수 컴퓨터로 처음으로


한 말이 “가자, 부루인스!(Go Bruins!)”였다는 것이(부루인스는 릭이 사는 보스턴 지역의 하키 팀이다.)


에잇... 감동적이자너


http://tinyurl.com/pu93t : 기사

http://tinyurl.com/luw58 : 동영상

뭐.. 뭐.. 뭐..야..?


이런 젠장할.


일하다가 아까 잠깐본 블로거는 17살.. 웹 호스팅사업을 시작했단다. 블로그의 내용도 만만 찮다.


범희 누님의 소개로 알게된 새벽편지 사이트에 chan story라는게 있어서 호기심 발동.. 들어가 봤다.


허 참.. 뭐.. 뭐.. 야..!! 이 친구 멋지자나


어쩜 이렇게 멋있는 젊은 놈들이 많은 거냐구


자기가 하고 싶은일을 하기 위한 그의 과정에 정말 박수를 보낸다.


이하 원문 ----------------------------------------------------------


http://www.m-letter.or.kr/chanstory/chanstory.htm


제목: 반추, 그 꿈만같던 100일 간의 기억들을 되뇌이다.


2004년 겨울.
꽤나 쌀쌀했던 것으로 기억되는 바람을 맞으며 나는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그리고 문득, 옷 깃을 파고들던 그때 그 바람처럼 마음 한 구석에서 삶의 갈증을 느꼈다.

10m 남짓 걸었을까?
"그래, 떠나자."

그렇게 나는 거짓말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결정을 너무도 쉽게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지, 하고 싶은 것은 해야하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해낼 수 있다라는 삶의 당연한 이치를 너무도 쉽게 믿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친구 재광이가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친구들과 함께 공항까지
배웅을 하던 날, 나는 휴학계를 내고야 말았다.

생각은 행동을 만든다.
나는 내 안에 규칙들을 세우며, 생각들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먼저 지금의 내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배낭여행을 떠나기 위해서는 돈과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에게는 돈도 시간도 없었다.

81년생. 한국나이 25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수능을 다시 보고 학교를 한 번 옮겼다.
덕분에 대학 2학년 휴학중에 아직 군대도 안 갔다온 상태였다.

친구들에게 10개월 동안 동남아시아 11개국 일주를 하겠다는 말을 처음 했을 때,
다들 미쳤다고 했다.
"남들은 모두들 미국이다, 영국이다 어학연수 가고, 인턴사원 알아보고,
취업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넌 지금 10개월 배낭여행에 준비기간까지 하면 1년이 넘는
시간을 낭비하겠다고? 더군다나 넌 군대도 가야 하잖아. 지금 너 제 정신이야?"

날 걱정하기에 말리려 했지만, 또한 날 잘 알기에 다음에 용기를 주었다.

보다 실질적인 문제는 경제적 상황에 있었다.
당시 나에겐 돈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배낭여행을 위해서는, 더군다나 10개월 이란
기간동안 동남아시아 11개국을 모두 일주하기 위해서는 돈은 당연한 필요수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모님께 손을 벌리는 것은 결코 내 꿈을 위한 핑계가 될 수 없었다.

경비를 마련하기 위한 방법으로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는데 첫번째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었고, 두번째는 기업체나 단체로부터 스폰을 받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아 여행을 떠나는 것 역시 너무도 값진 일이라 생각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걷고 싶었다.
그리고 기업체나 단체에서 스폰을 받기 까지의 과정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임을 알기에
도전해 보고 싶었다.

마음이 결정되면 나는 그것들을 구체화시켜 나간다.

'누구도 쉽게 자신의 돈을 내어주진 않을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하면 스폰을 받을 수 있을까?'
결론은 간단했다. 스폰을 받기 위해서는 나 역시 무언가를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년 반 가량 인터넷 교육 컨텐츠 개발 서비스 밴처사업을 했었고,
다행히도 그 후 기자생활을 하고 있던 터였다.

머리속에서는 기획안의 틀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매일 그것들에 살을 덧 붙여 나갔다.

우선 나는 나의 여행기와 사진, 기사를 연재할 매체를 커넥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포트폴리오, 기획안 들을 보냈으며, 그 결과 7군데의 큰 매체들에
글을 실을 수 있는 결과를 이끌어 냈다.

그리고 영상물을 위해 몇 몇 프로덕션들과 회의를 했고 결과, 제이스터 네트워크 프로덕션과
현지 촬영을 계약 하였다.

일이 어느정도 진척되었다고 느꼈을 때야 비로소 나는 부모님께 내 계획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언제나 그렇듯이 차분히 내 이야기를 다 들으신 후 하신 말씀은, 외국에 나가고 싶으면
어학연수를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학연수보다 내가 뜻을 품고있는 동남아시아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직접
경험하고 싶다는 뜻을 말씀드렸고, 늘 그렇듯이 부모님께서는 나의 결정을 존중해 주셨다.

지금까지 나의 부모님은 내 기억속에 한번도 "안돼!"라고 말씀 하신적이 없다.
내가 느끼는 부모님의 교육 철학은 "네 인생은 네 스스로가 결정해야 하며, 그 결정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나는 NGO 단체들과 연락을 취해 나갔다.
10개월이란 기간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지만, 단지 여행만 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들과
가까이에서 만나고, 함께 먹고, 자고, 부대끼고 싶었기에 생각한 것이 바로 NGO 였다.
NGO 단체에 들어가 현지인들과 함께 생활하고,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봉사하고,
우리나라 NGO가 현지에서 어떤 활동들을 하고 있는지 취재해 한국에 알리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결과 몇 나라를 제외하고 각 나라마다 한 두 군데씩의
NGO 단체들과 연결이 되었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본격적으로 기획안 만드는 일로 넘어갔다.
기획안의 기본 틀은 같았지만, 기업체 혹은 단체의 성격에 맞게 모두 10여개 이상의
버전으로 만들었다. 기획안의 분량이 너무 많아도 담당자 책상 옆 폐품 상자로 직행할
것임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기에 10페이지 분량에 내 소개와 이번 프로젝트의 내용,
기대되는 효과, 진행 단계와 필요 사항 등을 모두 담아냈다. 그리고 "자세한 내용은
세부 기획안을 통해 확인 하실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덧 붙였다.
만약, 세부 기획안도 한 부 보내달라는 말이 나오면, 이것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기획안을 100여 곳의 기업체와 단체들에 제안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 일은 매우 힘들고 이내심을 요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먼저 기업체나 단체의 고개 센터 등에 전화를 걸어 간단한 내 소개와 기획안에
대한 설명을 했다. 그리고 관련 부서와의 연결을 부탁했다. 그럼, 관련 부서의 아마도
말단 사원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다시 내 소개와 기획안 설명을 한 후, 담당자와의 연결을 요청해야 했다.
담당자와 연결이 되면 또 다시 내 소개와 기획안 설명을 하고,
"기획안 한 부 보내드리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메일과 연락처 부탁드립니다."
라고 해서야 어렵게 기획안 한 부를 제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금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이 과정도 그나마 빠른 일처리에 속했다. 담당자는 자리에 없기 일 수 였고,
보내진 이메일 중에서도 일주일이 지나도록 확인되지 않은 것이 많았다.

당시 기획안 만드는 작업과 제안하는 작업은 목동에 작업실에서 주로 이루어 졌는데,
내 미니홈피에 이런 글과 사진이 올라 간 것을 보면 그때의 내 일과를 짐작할 수 있다.





2박3일 집에도 안가고 계속 이곳에 있었다.
초췌해진 이 피부와 피폐해진 내 정신은 jayster가 건내는 각종 종합 비타민 3알로는
복구될리 만무했다.
수염도 기르고 폐인의 모습으로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었더니 문득 어디선가 내 머리를
포멧하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 그분이 오신것일까.........
내일은 이곳을 탈출해야 겠다.
2005.04.23

젠장, 지난 일주일 동안 하루빼고 여기서 살았다.
2005.05.01

여기까지 작업을 하는 동안 처음 예상대로 6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 프
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6개월이란 시간동안 때론 힘들고, 마음대로 안되고,
그래서 정말이지 다 때려치우고, 포기하고 싶었던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보다 두려웠던 것은 문득, 내가 지금 옳은 길을 가고 있느냐는 물음이 찾아 올 때였다.
나는 내 꿈을 쫒아 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순간 날개를 펼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마치 미운 오리 새끼가 된 마냥 내 날개는 남들의 날개와 달라 보였다.
그것이 때론 나를 덜컹 겁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그리 큰 문제도, 그리 오래 느끼는 감정도 아니었다.

나에겐 확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날개를 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닌, 한 마리의 멋진
백조가 되어 있을 것이다.

2005년 6월 27일...... 나는 꿈을 쫒아, 그리고 나를 찾아 길을 떠났다.
10월 4일 오늘...... 꿈을 쫒아 온지도 어느덧 100일째.

나는 한국에서 100발짝 멀리 온것이 아니라, 내 꿈에 대해 100발짝 더 가까이 다가온 것이다.

지난 100일 동안 나는 필리핀, 미얀마, 태국, 라오스, 베트남을 여행했으며,
말로 다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하였다.

뒤돌아 보면 수 없이 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내가 걸어온 흔적들을 말해주고 있다......

"나는 나를 넘어섰다."라는 어느 광고 문구처럼, 나는 나를 넘어서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

요즘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우리 학사 개발팀끼리 신선한 바람도 느끼고 기분전환차


체육행사날에 동학사를 아무 준비(?) 없이 갔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일한다는게 쉬운것은 아닐터인데 나름 호흡이 잘 맞는 우리팀이 역경을 뚫고


학사개발을 성공리에 개발해서 나름 좋은 결과물을 각각의 인생의 기록에 남겼으면 한다.


모두 모두 Fighting~~!!


시작이 반이다.. 라는 옛말이 있는데.

그냥 그런 말이 있나보다 라는 식으로 여겨왔다.


아래의 얘기는 자식공부를 위해 자기도 공부를 했던 한 주부의 얘기가 있다.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이제 새로운것을 한다는것이 너무 늦었고 성공할 가능성도 적기때문에


아예 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그냥 현실에 안주하길 바라며 사는게 일반적인것 같다.


이분도 처음 부터 박사학위를 목표로 시작 했더라면 그 긴 시간(20년 정도 일걸로 예상)이

힘이 들었을것이다.


무언가를 목표로 삼고 가는것도 좋지만 그것 자체를 즐기는듯한 자세로 임한다면 더욱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한다.

요즘들어 할수 있다는 생각을 계속 가지게 하는 좋은 얘기들이 가끔 들려 오는것 같아 좋다.


이하 원본 ------------------------------------------


“아이위해 공부하다보니 박사돼”…인하대 박사학위 받은 55세 주부 이태옥씨
[파이낸셜] 2006-02-21 02:13


자녀에게 공부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고 옆에서 공부를 시작한 주부가 대학에 들어가 박사학위까지 땄다.

지난 14일 인하대에서 ‘저고리 변천사’를 주제로 논문을 써 박사 학위를 받은 이태옥씨(55·여·서울 개화동·사진)는 20여년 전까진 공부와 거리가 먼 가정주부였다.

이씨의 공부가 시작된 것은 교사(수도전기공고)인 남편 윤동진씨(62)와 함께 일곱살, 다섯살이던 두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 외곽으로 이사한 지난 81년. 아이들이 탁 트인 공간에서 호연지기를 기르며 공부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으로 이사를 했지만 막상 가보니 학원 하나 없는 시골에 가까웠다.

학교 공부 보충을 위해서는 가정교육이 필요했다.

마침 이씨의 남동생이 고교입시 공부를 위해 함께 살게 돼 안방을 ‘가족 도서관’으로 개조했다.

자연스럽게 집에 들어오면 공부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처음엔 아이 옆에서 가계부를 쓰던 이씨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책상을 갖다놓고 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만 졸업한 게 항상 마음에 걸렸는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재미도 있고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교육은 부모가 직접 공부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한번 마음을 먹자 숨겨있던 이씨의 향학열이 불타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방송통신대 가정학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졸업 후엔 외가 쪽에서 물려받은 재능을 살려 대학원(건국대 의류학과)에 들어가 한국 전통 복식(服飾)을 공부했다.

석사 과정을 마친 뒤 한복집을 열었다.

침선(針線) 장인을 찾아다니며 사사(師事)해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 등에서 13차례 수상했고 한복침선 관련 특허도 6개나 냈다.

배움을 향한 이씨의 열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손재주 못지 않게 깊이 있는 지식에 목 말랐기 때문이다.

인하대 박사 과정에 들어간 지 4년 만에 결국 ‘조선왕조 말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저고리에 대한 실증적 변천’이란 논문으로 꿈에 그리던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식 농사’에도 성공했다.

큰 아들(32)은 명문대 졸업 후 미국에서 컴퓨터 회사에 취직했고 둘째 아들(30)은 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

이씨는 “아이들 옆에서 심심풀이로 시작한 게 여기까지 왔다”며 “공부하는 분위기가 잡히니까 아이들도 과외나 학원은 물론 잔소리도 필요없었다. 솔선수범만큼 효과적인 교육법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척 보아하니 인상들도 하나 같이 좋아 보입니다 ^^;


국가간 행복지수라는것을 본적이 있는것 같다. 이 조사의 결론은 나라나 국민의 부유함이 행복을 결정짓지는 않는다는것이다.

상대적인 행복감이라고 하나 주변의 사람들에 비해서 행복한 느낌을 같는게 더 크다는 거다.


그렇단 말은 결국 자신의 행복은 자기가 얼마나 만족하느냐에 달려 있는건데..

나이가 들고 가정을 가지다 보니 돈이 많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바보같은 소리일지는 모르겠으나 총각때는 사실 크게 돈욕심 없이 살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내 가정을 직접꾸리기전이서 그런가 보다.


이런 분들의 얘기는 나처럼 허약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보약이다.

중요한것은 똑같은 돈을 벌고 살아도 어떻게 버느냐 또는 어떤일을 하면서 버느냐가 중요한것 같다.


내가 부자로 살수 있음에도 다른 목적 특히 공익적인 목적을 위해 그렇지 않은 삶을 선택한다던가

내 자신이 스스로 만족할수 있기에 더 이상의 수입은 욕심을 내지 않는다던가..


한가지 궁금한것은 이분들의 가족들이 얼마나 이런 생활에 동의 하고 같이 행복해 하는것인가 이다.


서로를 이해 하고 받아주는 사람과 산다면 행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런 삶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가족을 이해 시키고, 싸워가며 보내야 하는가.


가장 맘에드는 구절은

"사회가 저희에게 변호사로 일할 기회를 줬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저희가 가진 걸 돌려줘야죠."

나도 이렇게 돌려줄수 있는 사람이 됬으면 한다.


부디 이런 좋은일을 하는 분들의 미래는 좋은일만 있기를...


이하 원본 ----------------------------------------


[동아일보] 2006-02-20 03:21
[동아일보] 공익변호사그룹 ‘공감(共感)’의 변호사들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을 도와 온 자신들의 활동이 별것 아니라고 말했다. 한번쯤 자랑할 만한데도 모두 말을 아꼈다.

공익소송을 지원하는 변호사 단체로는 국내 첫 번째인 공감이 지난달로 출범 2주년을 맞았다. 주인공은 염형국(廉亨國·33·사법시험 43회) 소라미(蘇羅美·여·32·〃) 정정훈(鄭晸勳·36·〃) 김영수(金永受·37·〃) 황필규(黃弼奎·34·〃 44회) 변호사 등 5명. 이들은 변호사로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한 채 2004년 1월부터 외국인 노동자와 성매매 피해 여성, 장애인 등에게 무료로 법률상담과 소송지원을 해 오고 있다.

▽“가난하지만 부자인 변호사”=A 변호사는 국가에 환수된 한 문중의 땅을 찾아주는 소송을 대리해 70억 원을 성공보수로 받은 사실이 밝혀져 최근 화제와 논란이 됐다.

하지만 공감 변호사들은 공짜로 소송을 대리하기 때문에 수임료와 성공보수를 받지 않는다. 이들은 “소외된 사람들이 권리를 찾는 것이 성공보수”라고 말한다.

소외된 사람들을 돕는 열정과 노력은 큰 데 비해 공감 변호사들이 받는 대가는 적다. 월급으로 받는 170만 원이 전부다.

그래서 공감 변호사들은 웬만한 직장인보다 가난하다. 자녀가 셋인 염 변호사는 전세를 구할 형편이 못 돼 부모 집에 얹혀산다. 소, 김, 황 변호사는 전셋집에 살고 있고, 대출을 얻어 집을 샀던 정 변호사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워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황 변호사는 “로펌보다 야근을 덜할 줄 알았더니 밤을 새우는 경우가 많다”며 “아내에게 생활비 100만 원을 주고 남은 70만 원 가운데 절반은 택시비로 쓴다”고 말했다.

▽공익소송 불모지에서 소중한 결실=공익재단인 ‘아름다운재단’ 산하기관으로 출범해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무실에 둥지를 튼 공감은 2년간 소중한 열매를 많이 맺었다.

공감이 최근까지 사회적 약자들을 대리한 소송은 총 84건. 법률자문 등 지원 활동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지난해 12월에는 성매매 업주와 사채업자에게서 5500만 원의 빚을 갚으라는 요구에 시달리던 성매매 피해 여성 6명을 대리한 소 변호사가 대법원까지 가는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또 지하철 승강장에서 떨어진 시각장애인의 사건을 의뢰 받아 철도공사에서 5700만 원의 배상금을 받도록 했다.

▽“인권 브로커가 공감의 목적 전파”=공감에는 이들 변호사 5명과 간사인 전영주(全英珠) 씨가 있지만 ‘인권 브로커’라 불리는 예비 법조인들도 있다. 이들은 공익소송을 널리 알리기 위해 법대생과 사법연수원생들로 구성된 ‘무급 인턴사원’이다.

공감은 22일 창립 2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새로운 도약을 꿈꾼다.

“사회가 저희에게 변호사로 일할 기회를 줬기 때문에 소외된 사람들에게 저희가 가진 걸 돌려줘야죠. 약자의 시각에서 공감하고 실천할 때 사회가 더 정의롭고 건강해지지 않겠어요?” 공감 변호사들은 오늘도 사회의 그늘을 비추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02-3675-7740, 후원계좌: 하나은행 162-910001-07637 이태훈 기자 jefflee@donga.com